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주만 공습 (문단 편집) ==== 미군 측 인물 ==== 아무리 기습이었다고는 하나 다수의 전함을 포함하여 막대한 피해를 눈 뜨고 당했기에 책임자 처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먼저, 태평양함대 사령관이었던 [[허즈번드 킴멜]] 대장은 소장으로 2계급이 [[강등]]되고 퇴역 처리되었다. 또한, 월터 쇼트 육군 중장도 1계급 강등되어 소장이 되며 퇴역되었다. 두 장성이 가졌던 해군대장과 육군중장 계급은 정규 계급이 아닌 전시 진급[* 전시 진급과는 약간 다르다. 애당초 태평양 함대 사령관은 미 해군에서도 대장만이 보임 가능한 직책이기 때문에 임시 진급한 것.]한 임시 계급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처분한 수뇌부에서도 크게 부담을 가진 건 아니었다. 또한, [[전역]]과는 달리 퇴역 처리되며 [[예비역]] 소집 대상에서조차 제외당했다. 판단 미스로 기습을 불러 경계에 실패한 책임을 물은 것으로, 징계로 2계급 강등한 뒤 나이가 있어서 어차피 예비역 소집은 불가능한 상태라 그냥 강등 후 강제전역시킨 것인데, 이게 진주만 공습 대처 미스라는 배경과 겹쳐서 사실상 불명예 전역으로 간주된 것이다. 그래도, 이들은 퇴역군인으로써의 혜택은 제대로 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계급 강등 후 전역당한 것 자체가 오명인지라 본인들 스스로 명예회복에 힘썼고, 그들 사후에 유족들 또한 명예를 회복해달라며 계속 대통령에게 청원을 냈다. 이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그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면 무죄가 되어 명예를 회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단, 킴멜 [[제독]]은 본래 소장 계급이었고 대장이 부임하는 자리인 태평양함대 사령관에 부임시키기 위해 임시로 대장으로 진급시킨 것이고 그의 전임자들도 많은 경우가 임시로 대장을 달았다 임기 종료 후 정규 계급으로 돌아갔는데, 이것은 미국 건국부터 상비군을 소규모로 뒀던 미군의 전통 상 고위 계급의 상설화가 어려웠던 여건(그 해소 시점이 바로 2차대전으로 그 영향은 현재까지 작용하고 있다)에서 인사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되었고 평시 상황이라면 킴멜 또한 동일했겠지만 킴멜이 재직할 당시엔 미국이 전쟁에 대비해 군비를 막 팽창시키던 시점으로 만약 진주만 기습을 잘 방어하고 개전 이후의 성과가 괜찮았다면 대장 계급을 정식으로 달았을지도 모르나 결과론적 제기일 뿐이다. 후임인 니미츠 제독 역시 소장 계급이었는데, 사령관으로 부임하며 임시로 대장으로 진급했다. 물론 니미츠는 엄청난 전과를 올리며, 이후 정식으로 대장 계급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수(계급)|원수]]까지 달았다.[*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까지 미군은 대부분 전시계급을 부여하고 잘하면 유지 못하면 원래 계급으로 복귀시켰으며 1차 세계대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진주만 공습을 허용한 것에 킴멜 제독과 쇼트 장군에게만 책임을 몽땅 전가하는 것은 확실히 과한 감이 없잖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논란이 존재한다. 헐 노트가 거부당한 시점에서 미국은 일본과의 개전이 임박했음을 인지하고 있었고, 일본이 [[청일전쟁|여태까지]] [[러일전쟁|그래왔던]] 것처럼 기습으로 개전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일본군이 과연 어디를 공격할 것인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미국의 전략가와 정책 결정자 중에 진주만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국무부 장관 헐은 마닐라나 괌을 예측했고 [[해군참모총장#s-3|해군참모총장]] 스타크 대장은 동남아시아에 일본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https://m.blog.naver.com/imkcs0425/220015071104|관련글]] 이 둘도 억울했는지 군사재판을 자진해서 신청하는 걸로 시작해서 거절당하고 전역한 뒤에도 계속 회고록을 펴내서 자신들을 스스로 변호했고 이들이 희생양에 불과하다는 르포 작가들의 책도 자주 나왔다. 특히, 킴멜의 자식들 중 1944년에 잠수함 USS 로발로(Robalo) 함의 [[함장]]으로 재직 중 함을 잃고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사망한 장남 매닝 킴멜 소령을 제외하고 차남 토마스 K. 킴멜(해군 대령 퇴역)과 삼남 매닝 킴멜 3세는 부친이 작고한 이후로도 부친의 명예회복 운동을 주도해나갔다. 킴멜 소령 역시 살아생전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킴멜 소령은 복무 시절 무리하게 교전에 임한 경우가 많아서 상부에서도 이를 우려한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전공에 매달린 것으로 추정한다. 매닝 킴멜 소령은 해군 내에서 자식에게까지 패장의 자식이라고 욕하거나 하진 않고, 도리어 [[연좌제]] 같은 거 없으니 제발 좀 자제하라고 할 정도로 의욕있게 복무했다. 함을 잃고 포로가 된 이유도 전공을 세우기 위해 무리하게 공격하려다가 역습을 당했다는 해석이 많다. 차남인 토마스 킴멜도 형과 마찬가지로 잠수함 장교로 복무했는데, 매닝이 전사하자 어니스트 킹 참모총장의 직권으로 함선 근무에서 강제로 배제되어 후방 지상 근무를 해야 하자 격렬히 반대했으나 결국 명령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 역시 연좌제가 아니라 오히려 토마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킹의 결단이었다. 토마스까지 사망하면 킴멜은 자식을 모두 잃게 되기 때문에 킹이 이런 결단을 내린 것.(삼남인 매닝 킴멜 3세는 전쟁이 끝난 뒤에 출생) 이러한 청을 받아들여 1999년 미국 상원은 투표에 부쳤는데 찬성 52 반대 47이라는 아슬아슬한 결과가 나와 이들의 계급을 회복시켜주도록 대통령에 권고했으나 당시 대통령인 [[빌 클린턴]]은 물론 후임 대통령인 [[조지 워커 부시]]도 거절했다. 물론 유족들은 승복하지 않고 계속 명예회복을 추진하고 있다. 일단 현재까지는 되지 않았으며 이들은 따라서 퇴역(retired) 소장 신분으로 되어 있다. 두 척의 [[갑표적]] [[잠수함]]을 격침한 USS 워드 함의 함장 아우터브리지 소령은 구축함 함장으로 근무한 지는 며칠 되지 않았으나, 갑표적을 발견해 격침시킨 공로로 능력을 인정받아 해군 십자장을 수훈했다. 이듬해엔 워싱턴 DC의 해군수송사령부에 배치되었다가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DD-725 오브라이언(O'brien) 함의 함장으로 다시 바다에 나갔고, 이 구축함은 태평양이 아닌 대서양으로 배치되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여했다. 오브라이언은 다시 태평양으로 돌아와 [[레이테 해전]]에도 참가했으며, 이 때 가미카제의 공격으로 손상을 입는다. 공교롭게도 그가 첫 함장을 맡았던 구축함 워드 역시, 진주만 공습 3년 뒤인 1944년 12월 7일에 가미카제 공격으로 격침되었다. 종전 후 [[해군대학]] [[교장]] 및 구축함 전대장 등 구축함 관련 업무를 맡다 소장으로 1957년 퇴역, 1986년 9월 20일에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일본 해군 항공기들을 제일 먼저 발견하고도 제대로 경보하지 않아 재판에 회부되었던 당직사관 커밋 타일러 육군 대위는 무죄를 선고받아 계속 근무했다. 무죄판결의 가장 결정적 사유는, B-17 폭격기들의 비행일정을 통보받은 이후이기 때문에 레이더의 항적을 적기가 아닌 본토에서 오는 B-17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지극히 합리적이라는 것.[* 사실 이런 경우에서 정확한 판단과 착오는 얇디얇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훗날의 일이지만 [[냉전]]기 ''''[[우발적 핵전쟁]]이 벌어질 뻔한 상황에서 지극히 단순한 보고 하나로 지구를 구한 사나이''''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같은 경우도 있고.] 이후의 경력도 딱히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미합중국 공군]] 창설 후엔 [[공군]]으로 전군해 [[중령]]으로 퇴역했다. 후일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의 판단을 후회하고 여러 번 악몽에 시달리긴 하였다. 또한 당시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는 편지들이 종종 오기도 했단다. 하지만 그 때의 판단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2010년 1월 23일, 96세로 [[샌디에이고]]에서 사망했다. [[https://www.latimes.com/archives/la-xpm-2010-feb-24-la-me-kermit-tyler25-2010feb25-story.html|커밋 타일러의 부고 기사]] 위의 유명한 전문을 보냈던 램지 소령은 [[미드웨이섬|미드웨이]] 주둔 부대의 작전관으로 [[미드웨이 해전]]에도 참전했고, 항공모함 CVE-21 USS 블록 아일랜드(Block Island) 함의 함장을 지내며 항모가 격침됐을 때 생존한 50명 중 한 명이 되기도 했다. 이후 소장 계급으로 퇴역한 뒤 1972년 9월 26일, 73세로 사망했다. [[도리스 밀러]]는 항모 엔터프라이즈 함상에서 체스터 니미츠 제독에게 직접 해군십자훈장을 수여받았고,[* 당시에 [[명예 훈장]]을 서훈해야 한다는 논란이 상당히 크게 벌어졌다. [[프랭크 녹스]] 해군 장관은 밀러의 명예 훈장 서훈에 반대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다. 자세한 것은 [[도리스 밀러]] 문서 참조. 아이러니한 것은 녹스의 이름을 딴 [[녹스급 호위함]] FF-1091에 밀러의 이름이 붙었다는 것.] 이는 최초의 흑인 수병 출신 훈장 서훈기록이다. 또한 그는 전쟁영웅으로서 전쟁채권 판매홍보에도 동원되고, 해군 모병 포스터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후 호위항공모함 CVE-56 USS 리스컴 베이에 배치되어 근무하다, [[타라와 전투]]가 끝난 직후 길버트 제도에서 이 항모가 일본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격침될 때 실종 및 전사 처리되었다.[* 시신도 찾지 못하여 일단 전투 중 실종 처리하였다가 나중에 전사 처리하였다.] 최종 계급은 조리하사였다. 2015년에는 오바마 정부 때 밀러 하사의 훈장을 [[명예 훈장]]으로 승격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2020년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로 [[제럴드 R. 포드급 항공모함]] 4번함(CVN-81)의 함명이 도리스 밀러로 확정되었다. 전통적으로 미해군 항공모함에는 [[제럴드 R. 포드|미해군에 대한 업적이 있는 전직 대통령]], [[제임스 포레스탈|전직 장관]], [[체스터 니미츠|전직 제독]] 또는 [[엔터프라이즈|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함선]]의 이름이 붙었다. 도리스 밀러는 사병 및 흑인 최초로 미해군 항공모함의 이름이 될 파격적인 사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